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당 전쟁 (문단 편집) ===== 소수론(30만 이하) ===== 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1차 전쟁에 참전한 당군의 행군총관 수가 40명을 초과하는데 여수전쟁 당시 한 명의 행군총관이 1만 명을 이끌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50만 이상의 지상군이 동원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일단 행군 총관이 이끄는 '''1군'''의 병력이 당의 시대에 따라 대단히 유동적이라 10,000명이라고 한정하기 힘들다. 이 설을 주장한 [[김용만]] 선생은 고대 [[춘추전국시대]]와 제([[제나라]])의 예에서 군의 수를 10,000명으로 추정하지만 바로 직전인 수나라의 군제만 봐도 1개 행군이 6,000여 명이었던 적도 있고, 20,000명에 달하던 때도 있다. 거기다 《이위공전서》에서 당의 군제는 1개 군이 20,000명인데 《당육전》에서는 5,000명 넘으면 총관 1명이 배치, 즉 5,000명 선부터 1개 군으로 셀 수 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안시성 전투의 토산을 쌓은 연인원이 50만이라 하지만 [[고구려#s-7|고구려군]]이 마냥 수성적으로만 대처하지도 않았고, 위의 [[요동성]] 전초전이나 주필산 전투, 그리고 [[오골성]]의 글필하력 요격전 등 다수의 야전도 치뤘다. 10만 정예병이라고 몇개 성에서 공격적으로 대처할 병력은 절대 아니고, 각 성에서 보급선을 끊고 적군을 소모시킨 후 주력 병력을 진출시키는 것이 고구려의 전략이라 그다지 기존 전략에 비해 수세적인 전략을 펼치지도 않았다.[* [[안시성 전투]] 이전까지 당군은 야전에서 상당히 유리한 것을 넘어 무패에 가까운 위용을 보이지만 진로상으로만 보면 여수 전쟁에 비해 크게 진전된 면이 없는데도 극적인 장치를 이용하여 위용만을 강조하는 등 비판적으로 볼 여지가 많다. 실제로 고구려를 공격할 때 압록, 평양으로 직공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지만 수양제, 당고종 역시 평양을 직공하고, 압록강 일대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당나라의 당시 공격 양상은 단순히 평양으로 어택땅! 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고구려를 접수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동성을 비롯한 성 10여개를 돌파한 것은 수나라에 비해 나은 전과이다. 하지만 당군의 후방에 신성과 건안성의 10만 대군이 뒤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평양 직공책이 반려된 점, 점령되었을 터인 요동성 일대가 당군에게, 특히 후퇴할 때 전략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 등은 아직 요동 일대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00만대군이라는 경고성 발언이 허황된 규모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최소 절반인 50만은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호왈백만]]이라는 사자성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10만명만 되어도 100만대군이라고 주장하는데는 별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10만대군만 되어도 어차피 시계로는 파악이 안된다. 50만설은 지나치게 많게 잡은 것으로 추측한다. 그냥 당 태종 직속 병력이 10만 명이거나 아니면 원수정 초, 중기의 [[로마 제국]]이 군단병과 보조병을 나눈 것처럼 로마로 한다면 [[레기온#s-1|레기온]]에 해당하는 병력만을 기술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듯. 또한 고구려 정벌에 10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가서도 패배한 [[양제(수)|수양제]]의 교훈은 '아 나도 100만 대군을 일으켜야겠다'가 아닌, 현실적으로 '한번의 정복전쟁으로 고구려를 복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개전 초기에 보였던 파죽지세의 모습은 심리적 공포를 활용해 고구려가 스스로 굴복하도록 만들거나 최소한 협상에 나오게 만드는 수단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